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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의 매립지 위에 서서 아나킨은 대체 어디까지 유치해질 수 있는지 의아해 했고 의아해 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사실상 느끼는 것 만으로도 벌을 받아 마땅한 감정들이다. 손바닥에 그어진 손금이 운명을 이은 선이라도 되는 양 라이트 세이버의 표면에 강하게 달라붙었고 아나킨은 제다이를 생각했다. 오더의 매끄러운 규율이나 어린 영링들의 웃음소리나 사원의 차가운 돌벽, 그리고 그 뒤에 기댄 오비완을 되새겼다. 오비완의 머리카락이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흐트러지는 순간은 세 번 이상 복기했고 복기할수록 기억이 너덜너덜해지는 것 또한 느꼈다. 하필이면 그 순간이 떠오른 이유는 아마 지금 오비완이 발이 땅에 묻힌 사람처럼 견고하게 서 아나킨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엄격함이 사라지고 슬픔으로 가득 찬 오비완의 몸 중에 부드러운 부분은 뜨거운 열풍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밖에 없었다. 좋은 향기가 나던 그의 의복도 불길이 가져온 잿더미가 가득 차 추욱 늘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아나킨은 유보에 대해 생각했다. 순간은 유보되어라, 결국에는 맞닥트릴 수 밖에 없었던 이 순간은 유보되어라, 그러다가 라이프 세이버의 운용음을 들었다. 오비완을 향해 몸을 날린 직후였다. 공기가 빛의 기둥에 지져져 고통을 호소하는 듯한 진동음을 듣자마자 아나킨은 격통을 느끼며 꿈에서 깨어났다.

 

 

 

 


절망의 한 부분*
 

 

 

 

 

 

 가슴을 크게 들썩거리며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아나킨은 잠시 말을 골랐다. 시간이 형편없는 침묵으로 용인되었다. 기름에서 막 건져올린 것처럼 미끄러운 장면이 눈을 감으면 아직도 시야의 뒷편에서 불타고 있었다. 영원히 용암이 흐르는 행성, 그 행성 위에서 대치중이던 자신과 오비완에 생각이 미쳤을때는 불현듯 라이트 세이버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아나킨은 손을 뻗어 의복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라이트 세이버에 포스를 집중시켰다. 마치 한 몸이었다는 듯이 손바닥에 흡착되는 금속이 차갑게 느껴졌다. 한참 금속이 체온에 달궈질 정도로 만지작거리던 아나킨은 몸을 느릿하게 일으켜 호흡했다. 마른세수가 두 차례 이루어졌다. 금세 가운을 걸치고 방 밖으로 나왔다.

 

 코러산트의 밤은 사막에서 자란 아나킨에게 있어 늘 쌀쌀하게 느껴졌다. 가운을 여미며 넓은 방을 지날때는 특히나 발자국 소리에 유념했다. 제다이로서의 수련이 아나킨의 삶을 타인과 영원히 다르게 만든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자잘한 행동거지에 있었는데, 아나킨은 완벽하게 기척을 숨기고 걸을 줄 알았다. 그것은 그가 오랜 시간동안 배워온 제다이의 예법보다도 몸에 잘 맞았다. 마치 그렇게 되기 위해 태어났다는 양.

 

 오비완의 방 문 앞에 서서 아나킨은 잠시 침을 삼켰다. 손이 닿을 필요도 없이 포스로 가볍게 열린 문은 거의 아무 잡음도 없이 벌어졌다. 오비완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감은 그 모습에 아나킨은 악몽이 둔중하게 뒷통수를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마스터."

 

 아나킨의 가라앉은 음성에 오비완이 문득 미간을 찌푸리더니 눈을 가볍게 떴다.

 

 "아나킨?"

 

 아나킨은 대답도 없이 침대의 근처로 가 한쪽 무릎을 접었다. 잠에서 덜 깬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던 오비완은 한쪽 팔꿈치로 몸무게를 지탱하는 것에 그치며 아나킨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남은 손을 뻗었다. 빛이 올곧게 와닿지 않는 아나킨의 얼굴에서 안 좋은 기색을 읽었기 때문이리라. 아나킨은 체온을 찾는 짐승처럼 고개를 움직여 오비완의 손에 온전히 뺨을 기댔다. 오비완은 가만히 그 뺨을 가볍게 쓸어주다가 몸을 완전히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니? 네 포스가 불안정하구나."

 

 오비완의 물음에 아나킨은 숨을 짧게 들이쉬며 무릎을 침대에 더 가까이 했다.

 

 - 마스터, 저는 꿈을 꿉니다. 행성에 관한 꿈입니다. 사실은 행성은 주인공이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행성 위에서 저와 마스터와 비행정과 아름다운 파드메와, 온갖 무서운 생각들이 스쳐지나가고 마스터의 라이트 세이버가 울고 있는 그런 꿈이요. 용암도 있습니다. 아주 뜨거운 온도에 질식할 것 같은 상태로 펼치는 대련은 어떻습니까? 대련이라기 보다는 대면이 어울릴것 같군요. 부드러운 지점이 없습니다. 마스터, 맹세컨데 절대로 부드러워 지지가 않습니다. 온도가 그렇게 높은데도 녹아서 말랑해진다기 보다는 되려 철벽처럼 얼어붙어서 두터워집니다. 오비완 케노비의 라이트 세이버가 제 다리를 자르고 지나가는 순간은 언제나 찰나인데도 꿈에서 깨어나면 가장 기억에 진득하게 남는 장면이예요. 오비완 케노비, 나는 그 이름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어요. 마스터, 그것은 낯섦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낯설다는 감각 자체는 익숙하지만 낯설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주체는 언제나 이질적이예요. 마스터, 그러니까 제 말은.......

 

 아나킨은 오비완과 시선을 부딛히자 금세 말이 증발하는 것을 느꼈다.

 

 "악몽을 꿉니다."

 

 그는 겨우 그렇게 말하고 이마를 내려 오비완의 무릎에 비볐다. 오비완은 자신의 제자가 보이는 답지 않은 모습에 잠시 당황했다가 아나킨의 뒤통수를 토닥였다.

 

 "번민하는 모양이구나. 좋지 않은 일이다."

 "당연히 좋지 않은 일입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예요. 마스터, 이런 꿈을 알죠?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지요? 예지몽과 일반적인 꿈은-"
 "알다마다, 아나킨. 진정해라."

 

 아나킨은 오비완의 말에 되려 고개를 번뜩 들고는 오비완과 시선을 맞추며 손을 뻗어 오비완의 손을 잡았다. 완벽한 이해를 구하는 몸짓이었다. 오비완은 아나킨이 이런 식으로 결핍된 면을 서슴없이 보일 때마다 눈앞이 암담해지며 아주 피곤해지는 것을 경험했다. 이마에 키스하는 게임을 말하는 것이다. 가엾은 것이 길을 잃었다는 표정으로 오비완에게 앞뒤도 맞지 않는 애정을 말하거나 불안을 말하거나, 그동안 사랑해 왔던 것들을 토로할때 오비완이 할 수 있는 것은 늘 그래왔듯 머리카락을 정리한 그 이마에 입술을 비벼주며 모든 것이 괜찮아 질 것이라고 선언하는 방법 뿐이었다. 언제나 유효한 것은 아니었어도 오비완은 그렇게 했다. 그 이상 아나킨이 가진 불가사의한 붉은 벽 너머를 넘어가려 들다가는 금세 발목이 잡혀 다시는 나오지 못할테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비록 오비완이 그 이상 접근을 거부해서 아나킨이 거리감을 느끼는 한이 있더라도.

 

 이 곳에서 어른은 오비완이다. 통제가 분명해야 하는 대상 또한 오비완이고. 아나킨은 아주 잠깐 오비완이 비친 난감한 표정에서 그것을 읽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오비완은 가만히 아나킨을 불렀다.

 "아나킨."

 아나킨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에 고개를 숙여 오비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아나킨."

 

 침착한 음성이 이름을 두 번 불렀을때 아나킨은 입술이 가는 방향을 틀었다. 바닥에 얌전히 닿아있던 무릎이 세워지고 스승의 손을 잡고 있던 의수가 천천히 위로 올라가며 오비완의 뺨 위에 얹어졌다. 오비완은 키스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쩐지 저항할수가 없는 기분이었다. 아나킨의 등 뒤로 뻗은 그림자가 마치 검은 날개나 타르 구덩이에서 겨우 벗어나온 생존자가 길게 끌고 온 발자국처럼 보인 탓이다. 아나킨의 숨이 아주 가까워졌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곧 입술의 버석한 느낌이 닿았다.

 

 아나킨은 입술이 닿았을때 다시 한번 꿈의 지점을 복기했다. 오비완이 라이트 세이버를 들고있는 그 장면이었는데 머리카락이 사선으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영원히 그 장면을 박제해두어 보기만 하여도 좋을 것이다. 꿈에서 묻어나오는 감정들이 날것들이라 지나치게 선득했다. 아나킨은 아주 오랫동안 입을 맞췄다. 경애의 뜻도 애정도 아닌 단순한 생존의 의지가 더 잘 어울리는 자세였다. 오비완은 손을 가만히 들었다가 도로 침대 위로 내려놓았다. 그런 제스쳐가 쌓이다 보면 금세 밤이 갈 것이다. 입술을 떼어냈을 때 오비완은 거대한 구가 연상되는 눈으로 아나킨을 올려다 보기만 했다. 아무도 말을 섣불리 꺼내지 않았다.

 

 "절망의 지점을 포착하는 꿈이예요."

 

 언제나 그렇듯 침묵을 깨는 것은 아나킨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이 관계를 간단하게 정의하는 지표같은 것이기도 했다. 언제나 아나킨이 먼저 깨트릴 것이다. 아나킨과 오비완이 무엇을 공유하든 간에. 그런 확신이 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나킨은 오비완의 눈 언저리를 의수의 차가운 엄지로 쓸다가 오비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절망의 지점을 포착하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당신은 내 절망의 한 부분이지요. 바꿀 수 없다는 기분이 자꾸만 들어요. 마스터, 듣고 있습니까? 이 꿈은.......

 

 이윽고 오비완이 손을 들어 아나킨의 등을 감쌌다. 그 순간 만큼은 온전했다. 아나킨은 곧 눈꺼풀 뒤에서 솟아오르는 화염을 유보시키고 얕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오비완은 웃음의 기척을 눈치채고 그래야 할 마땅한 이유도 없으면서 웃음에 동조했다. 거미줄 위를 걸어다니는 것 같은 일상이다. 해가 뜰 기미를 보였다. 아나킨은 팔에 힘을 주어 마지막이라는 듯 한번 거세게 오비완을 껴안았다가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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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의 참회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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