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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Watson

 


 

 

 


밭고랑같이 할퀴어진 모래사장에는 씨앗이라고 불릴만한 게 조개 파편이나 죽은 소라 따위밖에 없어 손쉽게 무덤이라는 이미지를 유추해 낼 법 했지만 정작 걸음마를 걷는 기분으로 모래속을 파고 든 허먼은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손톱 사이로 파고드는 알갱이, 연속, 살갗에 남는 소금기. 그런 것들을 관찰하고 생각했다. 바다를 바다 이외의 것으로 받아들여온 지 십삼년 남짓, 그렇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뭐로 하여금 잊게 되었는지.

지팡이는 슬리퍼보다 쉽게 젖은 땅에 흡착되었다. 말 그대로 고꾸라질 것 같은 모양새로 허먼은 말 없이 해변을 걸었다. 때때로 창백한 발가락에 물기가 돌기도 성급한 움직임에 모래를 신발코로 퍼 올리기도 하며 걸음마다 난장판을 만들었다. 뉴튼은 허먼의 뒤통수가 아름다운 비율로 배경에 남을 정도의 뒤에서 걸었다. 지팡이가 헛도는 것을 참고 있는 쪽은 누구인지 이 시점에서는 확실하지 않다. 이제는 온전히 파동의 시간이었다. 드리프트 이래 뉴튼과 허먼의 머리에는 전파 수신기 같은 게 세워져서, 라디오의 잡음같은 생각들도 가끔은 주파수를 타고 종종 전해졌는데, 자신의 것이 명확하게 아닌 전파들이 손끝이나 정수리에 다가오면 뉴튼은 아하 소리를 내었고 허먼은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쳤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원동력은 카이주의 멸종과 함께 서서히 쇠락했다고 보면 된다. 살아남은 롤리 베켓과 마코 모리가 종의 명맥을 끊었을때 뉴튼 가이즐러를 제일 먼저 방문했던 것은 안도감, 그리고 나중에는 상실감이었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래, 그렇게 살아왔기때문이라고 위안하며 마치 속옷까지 도둑맞은 기분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당혹스러웠고 알몸으로 황무지에 던져진 기분이라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뉴튼은 그리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몹시도 부끄러워 했으며 가끔 가감없는 밤에 손님처럼 침대로 기어들어오곤 했던 뉴튼의 체온을 몰래 훔쳤던 허먼도 그걸 알았다. 알면서도 언급 안했다. 이 시대에 드물게 착하고 순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허먼일 거라고, 아집에 차 무릎 아래의 허먼을 입술이며 손으로 엉망으로 만들때 마다 뉴튼은 생각하고 되뇌이고 머리 안에 각인시켰다. 허먼은 그 과정 전체를 감내했다.

파도 소리가 점점 크고 드물게 들렸다. 바람소리인지 바람에 흔들리는 옷깃 소리인지 불분명할 즈음에 뉴튼은 무어라고 말을 했다. 앞서 걷던 허먼은 그 말을 못 알아들은 게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뭐라고?"

그러나 이 말도 파도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허먼은 잠시 모래를 생각하던 것에서 빠져나와 몸을 돌렸다. 그러자 데칼코마니처럼 마주섰다. 몸을 돌리고 나서야 허먼은 줄곧 자신의 뒤에 보이는 배경에 말 세마리가 매여져 있었다는 걸 알았다. 말들은 삶을 그 모래 위에서 마감할 것이다. 그 사실에 대해 유감스러운 것 조차 자신들의 몫이 아니리라. 때때로 이방인을 등에 태우고 때때로 죽어갈 것이다. 허먼은 다시 물었다. "뭐라고?"

"나는 불순한 생각을 했어," 이번에는 좀 확실하게 들렸지만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았다. 굳이 따지자면 뉴튼은 본심의 부속지에 대해 말한 격이었다. 좀 끔찍하기도 한, 그런... 뉴튼은 입을 시체처럼 다문 채 또다시 고꾸라질 것 같은 모양새로 걸어오는 허먼을 보며 공포를 느꼈다. 원초적이기 보다는 학습된 쪽이었다. 나는 태평양에서부터 연장되어진 무덤 위에 서있다... 살의가 학습되어진 생물체들이 무너진 틈의 연장선에 서있다... 뉴튼은 눈을 비볐고 그 사이에 허먼이 크게 휘청했다.

부축은 공기를 마시는 것 만큼이나 당연한 수순이었으므로 뉴튼은 재고할 것도 없이 몸을 앞으로 기울며 손을 뻗었고 허먼이 밭게 숨을 내쉬며 그 손을 잡았다. 드리프트라고 처음에 생각했고 그 단어가 원망스러우면서도 푸른 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허먼의 살갗이 사랑스러워서 눈을 떼지 못 하겠는것이다. 뉴튼은 욕을 씹을 수 밖에 없었다. 허먼의 팔꿈치에서 어깨까지 느리지 않게 손을 스치며, 제기랄 이라던가, 염병 이라던가, 수수하고 당연한 욕지거리들, 그러고는 결국에는 본심에 닿았다. "분명히 천벌받을 생각이겠지만, 나는 몇백 만명이 몇천 만명이 죽더라도..."

카이주가 돌아왔으면 좋겠어. 말 끝은 거의 숨소리였지만 허먼은 알아들은 모양새로 고개를 짧게 숙였다. 순해보이는 앞머리가 바람에 파들거리는 걸 뉴튼은 영화라도 보는 기분으로 서 있었다. 사실은 고백 이후 완전히 소모되어 손가락 까딱할 힘도 없었다.

허먼은 어깨를 지나 뒷목까지 올라온 뉴튼의 손 쪽으로 가만히 기대며 허리를 약간 잡아당겼다. 금세 서로의 이마가 닿고 축축했던 피부가 달구어졌다. 저 말들을 보라구, 허먼은 전파를 보냈다. 뉴튼. 저 말들을 봐. 너나 저 말들이나 다를 게 없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래, 그렇기 때문에, 가엾고 아름답고 실패한 조개 껍데기같은 삶이었기 때문에... 아하, 그리고 파도 소리.
영원히 괜찮아지지 않을 것이다.

 

 

 

Afterm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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