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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Watson

*퍼시픽림의 롤리와 설국열차의 그레이가 맞습니다... 

 

 

 

 

 

 

"몇번이나 말 했지만, 왼쪽 허리 아래가 빈다구. 골반을 조금만 더 틀어도 이런 일은 안 생겨."
그레이는 숨결을 느꼈다. 오른 팔꿈치와 왼 팔꿈치가 서로 교차된 모양으로 몸통의 양 옆으로 손이 끌여당겨져 결박된 상태에서 롤리가 그레이의 뒤에 바짝 붙었다. 둘 다 오십여합은 겨룬 상태였기에 호흡이 불안정했고 숨을 내 쉴때 마다 앞가슴이 크게 팽창했다. 땀으로 인해 미끈미끈하게 마찰되는 자신의 등과 롤리의 가슴 사이에 비누칠이라도 한 것 같아서, 그레이는 금세 욕조를 연상했다. 그러나 금방 롤리에게 집중을 못한 것이 들킬거라고 생각했고 오롯이 비틀린 지점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신경을 모으려 노력했다. 그 짧은 순간을 롤리가 용케 포착하고는 잡힌 두 손을 단단히 당겼다. 집중. 통증을 헤집고 롤리의 한숨같지만 단호한 지시가 들렸다.
롤리는 마치 그레이가 얼마만에 해결책을 제시할 것인가 재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신중하게 혀차는 소리를 냈다. 일정한 간격으로 나는 소리는 마치 개구리가 우는 소리 같기도, 아니면 단순히 풍선껌이 터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레이는 그 소리가 대여섯번 났을때 - 아니, 정확히는 다섯번과 여섯번의 사이에 불시에 어깨에 힘을 주며 롤리를 바닥으로 밀어붙일 것 같이 뒤로 상체를 기울였다가 순간적으로 손목에 스냅을 넣어 결박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몸을 왼쪽으로 회전하기 전 비척이며 따라붙은 롤리의 손에 이번에는 바닥에 얼굴을 묻게 되었다.
"말했지, 왼쪽 허리."
롤리의 손이 그레이의 왼쪽 허리를 토닥였다. 뼈마디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한 손으로는 그레이의 오른 팔을 비틀어 잡은 상태로, 롤리는 그레이의 엉덩이에 주저앉았다. 그레이는 묵직하게 호흡이 막혀오는 것을 느끼며 어쩐지 자신이 왜 계속 결정적인 순간에 롤리의 손아귀에 잡히는 지 알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식으로 점성 높고 뜨거운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누구라도 힘들 것이다. 의식적으로 숨을 조절하고 있는데 롤리는,그레이가 비단 자신이 걸터 앉아있는 오브제가 아니라 숫제 자신의 침대나 의자라도 되는 것 처럼 손을 뻗어 그레이의 척추뼈를 헤아리는 것이다. 그레이는 목소리를 내는 게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졌다. "너는 지금 나 하나 가지고도 이렇게 애를 먹고 있어. 조만간 열명이든 스무명이든 싸워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롤리가 빈틈 없이 말했다. 그래이는 힘겹게 고개를 옆으로 틀어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떡하면 좋냐는 식의 눈길을 보냈다. 롤리는 몇번 더, 자신의 조각품을 신중하게 다듬는 사람처럼 그레이의 어깨를 주물러주다가 손을 놓았다.
목을 긁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던 그레이는 롤리의 목소리를 들었다. "모조리 쓰러질 때 까지 주먹질을 하는 방법밖엔 없지."




*



그레이는 롤리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열명 정도가 더 걸어들어오고 있었고 결론적으로 수를 셌을 때 총 열 아홉명이었다. 옷차림과 자세를 봤을 때 전문적인 요원은 아닌 것 같았고 고용된 용병같았다. 불규칙함... 그레이는 말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단어를 분명히 말했던 롤리의 입모양이 어땠는지는 어느 순간에서도 묘사할 수 있다고 확언할 수 있었다. 현기증이 나는 것 처럼 아드레날린이 뒤통수까지 올라왔다가 빠른 속도로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고요한 순간이 있었다.
그레이는 주먹을 날렸다.



*



마코가 메모리 칩을 기계 안에 넣었다. 그리고 벌써부터 현기증이 난다는 듯 비척비척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롤리는 그 모든 과정을 섬세하게 장면단위로 나누어 보았는데, 그건 별 다른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일종의 버릇이었다.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레이의 얼굴이 화면에 클로즈업되어 나타났다. 마코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있던 주먹이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왼 눈썹 위가 찢어지고 입술이 사정없이 터진 그레이가 새된 숨을 내쉬며 무언가를 잔뜩 겁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롤리는 저도 모르게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레이가 무슨 말이라도 할 것을 알고있고 자신은 그 순간을 놓치는 일 없이 들을 것이라는 표정으로. 화면에 손이 몇번 나오고 그레이가 진정의 의미로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었을 때, 롤리는 그렇지, 그렇게 하는거야, 하고 중얼거렸지만 그게 이 상황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리고 이 메모리 칩은 그레이가 행방불명이 된 지 하루만에 도착했다는 것을 - 하루, 짧지만 사람이 죽는데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 모든 상황을 총체적으로 조합해 보았을 때 이미 그레이가 살아있을 확률은 매우 적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화면에 보란듯이 노끈이 나오자 뒤에 앉아있던 커티스가 큰 소리로 욕설을 하며 방 밖으로 나갔다. 마코는 손을 뻗어 롤리의 등 정 가운데에 얹었다. 롤리는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롤리는 그레이의 목에 노끈이 매이는 장면을 아주 세심하게 관찰했다. 노끈 보다는 그레이의 표정에 포커스를 맞췄다. 연신 불안해 하던 그레이의 눈이 일시적으로 차분해지던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비디오가 멈췄다.
마코가 절망스러운 몸동작으로 롤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롤리는 그레이를 생각했다. 그게 올바른 예의였고 사실 그 순간에 그것 말고는 다른 어떤것도 할수 없게 되어버려, 가까스로 마코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던 바로 그 지점에 내장 모양을 한 우주가 사정없이 팽창하는 것을 느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간 밤에 사실 나는 꿈을 꿨어. 네가 나왔던 것 같기도 했고... 입 밖으로 내서 말했었나 확언은 할 수 없지만, "그레이의 시체를 찾으러 가자고," 라는 말은 확실히 했다. 마코가 이마를 부비며 고갯짓을 했다.  

 

롤리그레이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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