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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epilogue (Unofficial)

 

 

 

 

 

눈을 감았을때 본드는 정확히 몸의 어디가 피곤한건지 종잡을수가 없었다.

 

얇은 막 아래 덮힌 눈알이 금방이라도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나오기라도 할것처럼 들썩거린다.  만약에 179센티미터짜리 스펀지를 물에 담궜다가 꺼내면 지금 자신의 몸 상태와 비슷할 거라 생각하면서, 그는 잘 움직이지 않는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관절마다 물주머니가 들어있는것 같았다.  뼈가 얼어붙을것 같이 식어서 움직일때마다 몸을 둔하게 만든다.  며칠간의 불면이 -그리고 불면에 더해진 육체적 과부하가- 배설해낸 피로의 잔상은 눈을 힘주어 떠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본드는 눈을 비벼 빠져나오려는 눈알을 억지로 집어넣는 것 대신 시선을 내려 약간 낮은 위치에 있는 실버블론드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 옳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손이 없었기 때문이다.  47시간 전 M의 죽음을 보고하고 온 이래 본드는 좀처럼 가사상태의 실바를 억류해놓은 침대 옆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실바의 목을 조를 두 손이 그의 창백한 목으로부터 채 40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그 자리에서.

 

공허함. 공허함은 심리적 혹은 육체적 이유로부터 기인한다.  머릿속이 엉켜서 생각의 끝을 부여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Concentrate, you bloody idiot, 짓씹히는 입술.   본드는 주먹진 왼손가락 사이의 골을 한번씩 매만질때마다 숫자를 100에서 부터 되감았다. 100. 99. 육체적인 이유로는 부속지나 신체 일부의 소실이 있다. 98. 97. 소실된 신체의 일부에는 간사한 면이 있어서, 때때로 없어진 것이 아직 붙어있는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96. 92. 그런 고통을 환상통이라고 불렸다. 90. 87... 환상통은 심리적 이유로 생성된 공허함에도 적용되기도 한다. (숫자를 제대로 세고 있었던가?)  91. 90. 85...

60에서 수세기를 멈췄다.  숫자들이 혀 아래에서 간질거렸다.  (자격검사에 통과하지 못한 이유중의 하나이리라.)  M은, 따지자면 본드의 잃어버린 머리였다. (59, 58, 55.. 다시,) 머리없는 몸은 감각을 느낄수 있던가?  (100.)  어려운 연산을 할 능력이 없는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할것이다.  본드는 실바가 그 사실에 감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맑게 생각할수 있었다면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40센치 안밖에서 무기력하게 늘어져있는 손을 뻗어 실바를 죽일수도 있었다.  새끼손가락이 그의 무의식에 반응이라도 하듯 움찔거린다.  손을 뻗으면 금방이었다.  사람이 죽는것도 금방.

 

99.

 

가습기에서 빠져나온 수증기가 고아하게 공기중으로 뿜어져 나갔다. 본드의 시선이 색채없는 특수병실의 블라인드의 갯수라도 세는듯 그 근처에서 아른거렸다. 무미건조한 직사각형의 연속이 흥미로운 영화라도 되는듯이 지켜보던 그가 실바의 달라진 상태를 알아차린것은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M은 죽었나?"

 

본드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수 없었다.  낭패감 비슷한 당혹감이 명치끝을 치고 올라왔다.  감겨진 실바의 깊은 눈주름이 얕게 경련했다.  몇시간동안 닫혀있었던 그 입가가 갈증을 무덤덤하게 인내하며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환청이라고 치부해버렸을 만큼 정적인 목소리였다.  한숨이 필요하다면 지금이다.  현기증같이 정수리에서부터 내려오는 고단함.

 

"티아고 로드리게스."

 

이름을 듣는 남자의 눈이 한번, 깜빡거렸다. 본드는 문득 자신이 여태까지 무기력하게 쳐져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백년동안 잠이란걸 자본 적이 없는 사람같이 초췌한 얼굴을 한 실바가 입을 다시 열었다.  "M은?"  어쩐지 본드는 참을 수가 없었다.

 

" 그녀는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이건 요즘 유행하는 유머중 하나였던가?  침착하게 다리 사이에 놓여있던 본드의 손이 바르르 떨리더니 부지불식간에 파도같이 일어나 침대에 결박된 실바의 멱살을 그러쥐었다.  진통제에 절어 동공이 확장된 로드리게스의 안구에 본드의 얼굴이 덧바른 페인트처럼 일렁였다.  Excessive bleeding.  M은 데스크직이었다.  예전엔 어쨌는진 몰라도 최근의 그녀는 총알이 날아가는 소리보다 모니터의 명멸이 익숙했을것이다.  총상을 입었다는 것을 일찍 밝혔더라면 살 수 있었을수도 몰랐다.  그러나 본드는 어쩐지 M이 이런 결말을 원해왔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남의 목숨을 소모할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중에서 자신의 목숨도 소모품으로 올려두는 이들은 드물다.  M은 보기 드문 여자였다.

가볍게 떨리던 본드의 목소리 끝이 기어코 뭉개졌다.  실바는 문장이 미처 끝나기 전에 눈을 부릅 뜨고는 감을 줄 몰랐다.  한참동안 수증기 쏟아지는 소리만이 적적하게 들려왔다.  창 밖에 나뭇가지가 창문을 긁고 지나가는 것이 마치 갈비뼈 사이를 할퀴고 지나가는 메마른 손톱같았다.  

 

바람소리가 좀 사그라들었을때야 본드는 M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잡았던 때와 반대로 침착하게 실바의 멱살을 놓았다.   실바의 호흡이 콧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번에 확 터지는 것이 숨쉬는것을 잠시 잊은듯했다. 

구겨진 병원복 위로 실바의 억누른 신음이 미끄러져나왔다.

 

"죽이지 않고 뭐하는거야!"

 

실바가 끔찍한 소리를 냈다.  잔잔했던 공기를 사정없이 뒤흔드는 처절함이었다.  본드는 무의식중에 몸을 뒤로 물렀다.  실바는 마치 다섯살 짜리 어린애 손에 맡겨진 꼭두각시 인형같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사지를 흔들고 고개를 들어 연신 뒤통수를 침대에 처박는 모습이,  가슴과 허리, 허벅지, 종아리부분에 채워진 구속구가 아니었다면 침대를 뒤엎고도 남았을 발악이었다.  실바의 광기어린 표출을 보고있던 본드는 문득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바의 구겨진 미간에 붉은 기운이 가득했다.  핏대까지 선 목선을 따라 그의 눈물이 줄기를 이루더니 격한 움직임에 따라 이불에 파문자국을 남겼다.  본드는 입 안 가득 채우는 쓴 맛을 느끼며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지르는 실바의 푸석한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잔뜩 정신나간 사람처럼 악을 쓰던 실바는 이제는 본드 쪽으로 시선을 돌려 애원하고 있었다.  물고기처럼 죽어버린 무기질의 눈이 바라보는 느낌은 생각보다 끔찍했다.  나를 죽여, 본드.  살려뒀다니 믿을 수가 없군.  이젠 다 끝났어.  어서 나를 끝내...

 

본드는 물기가 고이는 실바의 얼굴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몸을 빼내 특수병실을 나가기 직전까지 들려오던 흐느낌이 계속 타르로 가득 채워진 구덩이처럼 신발을 잡아먹었다.  나는 너를 죽일 수 없다.  곧 재판이 있을테니...  본드는 그게 중요한 사실이라도 된다는 듯이 입 밖에 내었고 즉각 그렇게 한 것을 후회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병실의 문을 닫았다.

 

 

 

 

 

 

 

Falling into the D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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